언니네 이발관은 보컬 이석원이 고등학교때 보았던 일본 성인영화의 제목이다.

그는 피시통신 음악동호회에 글을 올리면서 자신을
언니네이발관 이란 밴드의 리더로 소개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런 밴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뮤지션들이 많은 음악동호회였기 때문에 자기도 음악을 한다고 해야
꿀리지 않을 것 같아 그랬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정말 그런 밴드가 있는줄 알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 자신조차 스스로 있지도 않은 밴드의 리더라고 믿게되는
이상한 상태가 되었다.

 
  어느날 이석원은 KBS FM '전영혁의 음악세계'에 나가 '언니네 이발관'이란
밴드를 하고 있다고 공식적인 구라를 침으로써 언니네 이발관은
일약 유명밴드로 도약한다.

이후 다룰줄 아는 악기가 하나도 없으면서 보컬겸 기타였던 이석원에게
류한길이라는 인물이 키보드를 칠줄도 모르면서 키보드로 합류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지금은 테크노 9단으로 불리우는 데이트리퍼가
바로 류한길이다) 동호회의 시삽 류기덕이 베이스로,
드러머는 단지 팔다리가 길다는 이유만으로 유철상이 낙점된다.
 
  첫합주. 압구정동 화이트 스튜디오.

5월
1년만에 다시 전영혁의 음악세계에 나가게 된 이석원.
일주일간의 밤샘끝에 언니네이발관의 노래를 만들어
자기 노래를 자기가 소개하다.

이것이 대단한 반향을 일으켜 밴드는 탄력을 받게되고 방송을 듣고
열광하던 까까머리 중학생 정대욱을 기타리스트로 들이게 된다.

6월 류한길 탈퇴. 이후 테크노 아티스트의 길을 걷다.

95년
데뷔 공연 set list를 자작곡으로 채운 최초의 밴드.
드럭 역사상 최다 관객 동원.

이때까지만 해도 밴드가 자작곡을 연주한다는것은 우리나라에서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밴드들은 '카피곡 연주하기'를 당연시 해왔고
자작곡이란 외국 프로밴드들이나 아니면 앨범을 낼때라야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한때에 언니네이발관은 첫 공연부터 자작곡을 연주한
최초의 밴드였고 자기만의 소리를 낸다는것은 그들의 존재이유와도 같았다.

그들이 라이브 데뷔를 한 클럽 드럭에 찾아가서 공연 요청을 했을 때
처음에 거절당한 이유도 바로 자작곡이란 이유에서였다.

“우리 애들은 아직 자작곡을 할 실력이 안되는데 이발관이 자작곡을
해 버리면 애들이 위축될 수도 있다”는 것이 드럭측의 답변이었다.
 
  우여곡절끝에 밴드는 공연을 할 수 있었고 당시까지 드럭 역사상
최고의 관객동원수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날 연주된 곡은 '로랜드 고릴라'와 '소년' 등이었다.)
 
  여세를 몰아 발표된 데모앨범 [비둘기는 하늘의 쥐]가 순식간에 동이나고
여러 메이저 기획사의 러브콜을 받게 된다.
 
  1집 비둘기는 하늘의 쥐(’96/신나라레코드/석기시대)

그저 라이브 한번이라도 해보고 찢어지는게 목표였던 팀이
어느새 앨범 제작을 하고 있었다.

1집 [비둘기는 하늘의 쥐]는 런던의 메트로 폴리스로 직접 날아가
마스터링을 해왔을 만큼 밴드는 정성을 들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기타팝 앨범으로 평가 받았다.
앨범은 발매되자마자 숱한 화제속에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으며 판매고도
호조를 보였다.
또한 평론가들은 그해의 앨범 10선에 [비둘기는 하늘의 쥐]를 선정한다.
(한겨레신문)
 
  정대욱은 고3생활을 하고 유철상은 흑인음악을 하겠다고 팀을 나가
훗날 바이닐, 아소토유니온을 거쳐 윈디시티를 결성한다.
애초부터 전업 뮤지션의 삶을 생각하지 않았던 류기덕은 게임회사에 들어갔다.
이석원은 잡지사를 차려 무가지를 발간하는등 음악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며
해를 보내게 된다.
 
  2집 후일담(’98/신나라레코드/석기시대)

리듬파트의 공백을 메우려 미디로 작업하던 그들에게 데모때부터
녹음을 도우던 전 노이즈가든 출신의 이상문이 베이스를 맡겠다고 제의하고,
마침 캐나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드러머 김태윤까지 합류함으로써
밴드의 라인업을 갖추게 된 이발관은 방향을 180도 선회,
밴드음악으로 2집을 준비하게 된다.

그렇게 1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석원과 정대욱은 산고끝에
2집 후일담을 만들어 세상에 던졌으나 당시 평론가중 그 누구도 이 앨범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대중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였다.
 
  더이상의 활동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2집 앨범을 접고 잠정적 휴지기에 돌입.
2집 작업을 끝으로 정대욱은 이발관을 탈퇴하고 이석원은 회사원이 된다.
 
  아픈 강아지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석원은 언니네이발관을 재가동.

활동다운 활동을 해보지도 못했던 1집과 2집앨범이 뒤늦게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여러곳에서 3집 앨범에 대한 제의를 받게된다.

9월.
임시멤버로 동경의 유서깊은 아카사카 블리츠에서 공연.
세션이었던 베이스 정무진이 정식멤버로 가입.
 
  본격적인 새 멤버를 오디션을 통해 찾는 와중에

1월. 드러머 전대정. 당시 군미필이었으나 팝터치에 반해 가입.

3월. 포기하려던 마지막 순간에 거짓말처럼 기타리스트 이능룡 등장.

7월 27일. 다시금 재개된 첫 공연.

11월. 1년동안 작업된 새앨범 [꿈의 팝송]이 4년만에 발표.
.........강남북의 교보문고를 모두 돌며 세차례의 쇼케이스.
.........앨범 [꿈의 팝송]은 인디 역사상 공전의 히트를 기록.

2002년 12월 12일.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생애 첫 콘서트.
 
  첫번째 콘서트는 성황리에 끝났으나 밴드는 뜻밖의 질타를 받게된다.
팬들이 커버곡을 자제할것, 유명 게스트 초대와 이벤트보다
이발관의 음악에 충실할것을 주문한 것이다.

이에 절치부심

보통 앨범발매때 아니면 년말에만 콘서트를 여는 다른 가수들과 달리
1년간 무려 네차례의 극장 콘서트를 감행하였고,
이를 위해 기타 이능룡은 이발관의 전곡을 재편곡 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밴드는 라이브 스타일을 확립해 나간다.

그 결과 콘서트헤븐, 봄의 팝송, 달맞이 콘서트, 천국의 나날들 등
모든 콘서트가 매진되었고 팬들은 그들을 지지하였다
 
  팀의 정신적 지주이자 2집의 베이시스트였던 이상문이 지병으로 숨을 거두다.

추석. 가을.
"달맞이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월요병 콘서트가 열렸다.
 
  이상문의 죽음으로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혼란속에서 여름.
4집 "순간을 믿어요" 발표.

9월 재팬 투어.
10월 월요병 콘서트 그 두번째
12월 베이스 정무진 탈퇴. 이후 더캔바스 결성.
 
  세션 베이스 유정균 등장.
자신의 밴드 세렝게티를 하고 있으면서 이현우 밴드등의 마스터로
활동하던 인물.

6월
최초로 작업실 마련. 컨트롤룸과 녹음부스, 휴게실, 창고까지 있었던 공간.
직접 방음공사를 하고 인테리어도 하다.

11,12월 두달간 월요병 콘서트 그 세번째 두달간 총 3000명 관람.
.. . .. .... 월요병 퇴치(를 위한) 콘서트 라는 타이틀로 매년 열리는
.. . ... ... 이 콘서트가 언니네이발관 고유의 콘서트로 자리를 잡게 된다.

세션 베이스 유정균이 붙박이 세션이 되면서 이석원, 이능룡, 전대정, 유정균
4인 체제로 호흡을 맞춰가게되는데 이 라인업은 5집 작업을 할때까지 계속된다.
 
  5월
전대정과 이석원이 사업에 몰두하는 동안 기타 이능룡이
이에 반발해 팀을 탈퇴, 복학을 하게 되고
전대정과 이석원도 분열, 셋은 각자의 삶에 몰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석원에게 가장 보통의 존재의 모티브가 되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셋은 다시 뭉쳐 앨범 작업에 돌입한다.

 
  또다시 헤드쿼터스를 구축한 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스타일과 강도로 시작된 작업.

밴드는 회사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원하는 상태가 나올때까지
작업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 어느 때보다 힘들었던 곡쓰기의 여정은
최초의 발매일을 훌쩍 넘겨 12월 14,15 양일간 벌어진
발매기념 콘서트날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결국 다섯차례나 연기의 연기를 거듭한 새앨범 '가장 보통의 존재'는
8월 8일에야 발매될 수 있었다.